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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SU PRESS] [2024 파리 하계올림픽 기대주 특집] ‘100년 만의 천재’ 류성현 학우, 재학생 최초로 올림픽 무대 두 번 밟는다

  • 작성자 김세준
  • 작성일 2024-04-09
  • 조회 28


5년 기다림 끝에 겨우 이룬
체조선수의 꿈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학교에서 체육수업을 듣던 중 우연히 체조부 형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봤다. 여지껏 살면서 이렇게까지 멋있다고 느낀 운동이 있었나 싶었다. 귀가하자마자 종일 낮의 기억을 떠올리며 혼자서 핸드스프링을 연습했다. 그러다 지쳐 잠들었다.”


류성현 학우(체육 21)가 전한 체조와의 첫 만남이다. 잠에서 깨자마자 그는 곧장 부모님에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체조선수가 되겠다고 졸랐다. 하지만 돌아온 건 강한 반대. 그의 아버지 또한 운동선수 출신이다. 아들이 걷고자 하는 길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울지 눈에 선했다.


“고민 끝에 부모님께 체조를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극구 만류하셨다. 아마 아버지께서도 젊은 시절 축구선수로 활동하셨기에 더 그러셨던 것 같다. 자식이 스스로 어렵고 힘든 길을 가겠다는데 말리지 않을 부모가 어딨나. 나였어도 그랬을 듯하다.”


이후 류 학우는 체념하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애써 외면해도 자꾸만 눈에서 체조가 아른거렸다.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갈증에 잠깐 방황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 정말 부모님 속을 많이 썩였다. 언제 한 번은 크게 사고를 친 바람에 부모님을 학교로 모시고 온 적도 있다. 왜 그렇게까지 말썽을 부렸나 모르겠다. 죄송한 마음에 체조선수가 된 이후로는 정말 운동 하나에만 매진했다.”


쉬이 꺼지지 않는 마음의 불씨. 끝내 류 학우는 체조장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부모님 허락을 받지 못한 탓에 정식 부원은 될 수 없었다. 대신 어깨너머 보이는 훈련 장면을 스승 삼아 혼자 연습했다.


“매일 체조장 주변을 기웃거렸다. 학교 마치자마자 달려가 저녁 시간이 다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먼발치서 체조부 형들의 기술을 구경하다 가끔은 혼자 따라도 해보고 그랬다.”


류 학우의 체조 독학은 4년 넘게 이어졌다.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던가. 2013년, 드디어 그도 삶의 전환점을 맞았다. 평소 류 학우를 눈여겨보던 코치가 그를 체조의 길로 이끌었다.


“어느 날 코치님이 재능 있어 보이는데 왜 체조부에 들지 않냐고 묻더라. 하고는 싶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있다고 말했다. 대답을 들은 뒤 코치님은 내게서 아버지의 연락처를 받아 갔다. 그러고는 직접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코치님의 한참 설득 끝에 결국 아버지께서도 마음을 여셨다. 덕분에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부터 정식으로 체조선수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제 발로 선수촌을 뛰쳐나간 이유
‘훈련 스타일이 안 맞아서’
막상 업(業)으로서 체조를 마주하자 류 학우는 마음이 꺾였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힘든 나날이었다. 그냥 얌전히 아버지 말이나 들을 걸 후회막심했다.


“초등학교 때까진 괜찮았는데, 중학교 올라가면서부터는 훈련 강도가 버겁게 느껴졌다. 단순히 시간만 따지더라도 훈련량이 전보다 2배 이상 늘었다. 큰소리치고 시작했던 터라 웬만해선 견디려 했는데, 의지만으로는 한계가 있더라. 결국 아버지께 그만두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애초 류 학우의 아버지는 그가 체조선수가 되길 바란 적 없다. 그러나 이미 주사위를 던졌으니 끝을 보길 원했다. 지금 아들이 포기한다면 훗날 밀려오는 미련에 괴로워할 것을 잘 알았다. 그 역시도 젊을 적 부상으로 인해 축구선수의 꿈을 접어야만 했으니까.


“아버지께서 ‘그만두는 건 네 선택이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으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에 정말 후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일말의 미련도 남지 않을 때까진 절대 포기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다시 심기일전한 류 학우는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압도적 기량을 보이며 중등부 무대를 휩쓸었다. 고교에 진학하고서는 1학년 때부터 바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어릴 적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다. 운동선수가 성공할 길이 운동 말고 뭐가 있나. 기왕 다시 마음잡은 거 아예 체조선수로서 끝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뒷바라지 해주시는 부모님 목에 메달 한 번 걸어드리겠다는 각오로 내달렸다. 간절함이 통했는지 운 좋게 이른 나이서부터 대표팀에 발탁됐다.”


분명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의 자리. 그런데 어째선지 류 학우는 제 발로 선수촌을 뛰쳐나왔다.


“훈련 스타일이 나와 맞지 않았다. 원래 있던 곳에서 운동하는 게 더 편했다.”


다소 당돌한 이유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혹자는 건방지다고 느낄 수도 있다. 다행히 체조계는 줏대 있는 유망주의 등장을 반겼다. 당시 대한체조협회 부회장이던 우리 대학 한충식 교수(체육학과)도 “류성현은 멘탈이 강하고 주관이 뚜렷하다. 스스로 운동할 줄 아는 선수”라며 한 언론사와 인터뷰에서 그를 치켜세웠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의 탄생
결과적으로 그때 류 학우의 선택은 결코 아집이 아니었다. 본인만의 훈련 방식으로 이듬해 또다시 태극마크를 손에 쥐었다. 하지만 이때부터는 전과 달리 선수촌에 들어가 살았다. 일류들만이 모인 곳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기로 결심한 까닭이다.


“높은 도약을 위해서는 큰 도움닫기가 먼저다. 선수로서 더 성장하려면 익숙함에서 벗어날 필요도 있다고 생각했다.”


선수촌에서 생활하며 류 학우는 자신의 기량을 만개했다. 2019년 헝가리 죄르에서 열린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는 마루운동 종목 초대 우승자가 됐고, 고교 3년이던 2020년에는 호주 멜버른에서 펼쳐진 국제체조연맹(FIG) 종목별 월드컵 대회에서 마루운동 종목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21년 6월 치러진 남자 기계체조 도쿄올림픽대표 최종선발전에서는 양학선(35회졸), 김한솔, 이준호(이상 38회졸), 신재환(41회졸) 등 쟁쟁한 선배들을 모두 밀어내고 당당히 1위에 오르기까지 했다.


“올림픽에 나간다는 게 실감이 안 났다. TV로만 보던 무대에서 직접 뛴다고 하니 도대체 실제인지 꿈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혜성처럼 나타난 특급 신인을 두고 신형욱 당시 남자 대표팀 감독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선수다. 운동 센스부터 순발력, 유연성, 정신력 등 체조선수로서 갖춰야 할 모든 걸 타고났다. 기술 습득에 걸리는 시간도 남들보다 10배 이상 빠르다. 앞으로 체조 역사에 길이 남을 선수가 될 것”이라고 극찬했다. 덕분에 이때 이후로 류 학우는 한 가지 별명을 얻었다. ‘100년 만의 천재’. 하지만 정작 그는 본인이 재능 없는 선수라며 손사래를 친다.


“100년 만의 천재는 너무 과분한 칭찬이다. 나는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한 가지 장점이 있다면 남들보다 조금 더 성실하다는 것 정도다. 다른 사람이 한 번 연습할 때 나는 두 번 한다.”

 

도쿄올림픽 아쉬움 씻어내고
‘류성현’ 세 글자 각인하고파
세간의 관심과 달리 류 학우는 도쿄올림픽에서 ‘통한의 4위’에 그쳤다. 경기 내내 좋은 연기를 펼쳤으나 마지막 순간 실수가 났다. 그것도 하필이면 가장 자신 있는 ‘더블앞공(2연속앞공중돌기)’이 발목을 잡았다. 더블앞공은 그가 초등학교 때부터 익힌 기술이다. 때문에 평소 눈감고도 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당일 그는 그만 더블앞공 후 균형을 잃고 말았다. 게다가 경기장 라인까지 밟는 바람에 적잖은 감점을 당했다.


“뭔가에 홀린 것 같은 날이었다. 다른 기술도 아니고, 하필 평소 가장 자신 있는 더블앞공에서 실수를 범했다. 감독님께서도 경기가 끝난 후 내게 ‘곡할 노릇’이라며 안타까워하셨다. 더군다나 최종 순위 또한 입상권 바로 다음인 4위였기에 스스로도 정말 많이 아쉬웠다.”


한 차례 고배를 마시긴 했으나 류 학우는 빠르게 다시 일어났다. 주눅 들긴커녕 외려 ‘할만하다’고 생각했다. 한국 나이로 20살 때 처음 나간 올림픽에서 4위라니. 틀림없이 다음 대회는 더 잘할 수 있으리라 스스로를 다독였다.


도쿄올림픽 이후 새로운 목표도 만들었다. 언젠가는 꼭 자신의 이름을 딴 기술을 선보이는 게 꿈이다.


“도쿄올림픽 이후 많은 생각이 들었다. 기자들에게도 조금 섭섭했다. 올림픽 전에는 한 번만 인터뷰해달라고 난리더니, 메달을 못 따니까 바로 찬밥 신세다. 반대로 메달 획득에 성공했더라도 그때만 잠깐 찾고 말았을 것 같다. 그러니 은퇴 전 반드시 ‘류성현’ 기술을 완성할 계획이다. 메달 색깔과 상관없이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선수가 되고 싶다.”

 

빗장뼈 골절로 시즌아웃,
기적처럼 날아든 파리행 티켓
류 학우는 지난 항저우 아시안게임 때는 소식이 잠잠했다. 비슷한 시기 펼쳐진 세계선수권대회 때문이다. 대한체조협회는 두 대회를 앞두고 대표팀을 1진급과 2진급으로 나눴다. 그러고는 2진급은 아시안게임에, 올림픽 단체전 출전권이 걸린 세계선수권대회에는 1진급을 각각 파견했다. ‘천재’ 류 학우는 단연 1진급 선수 명단에 포함됐다. 그러나 사실 그는 아시안게임에 더 나가고 싶었다.


“말 그대로 세계선수권대회는 전 세계 선수가, 아시안게임은 아시아 선수만 참가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선수권대회의 격이 아시안게임보다 높은 건 맞다. 하지만 세계선수권대회는 이미 경험해 본 적 있어 내심 아시안게임 차출을 더 기대했다.”


바라던 아시안게임 출전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아쉬울 건 없었다. 세계선수권대회 또한 여전히 류 학우에겐 가슴 벅찬 무대였다. 그렇기에 평소대로 최선을 다해 대회 준비에 임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한국 대표팀은 지난해 10월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개최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파리올림픽 남자 단체전 출전권 획득에 실패했다. 최종 순위 14위를 기록하며 상위 12팀에 주어지는 파리행 티켓을 아쉽게 놓쳤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경기를 치르던 중 류 학우가 왼쪽 빗장뼈에 골절상을 입고 만 것이다.


“골절 직후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온몸을 뒤덮었다. 본능적으로 남은 선수 생활에 지장이 갈 수도 있겠다는 걸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시즌아웃 판정이었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지 못한 류 학우가 파리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올해 2월부터 4월까지 펼쳐지는 FIG 종목별 월드컵 대회를 통해 추가 티켓 확보를 노려야 했다. 그러나 두 대회 사이 간격은 불과 4개월. 훈련은커녕, 다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도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었다. 


“부상 이후 훈련을 거의 못 했다. 그나마 몇 번 했을 때마저도 기록이 엉망이었다. 그냥 월드컵 대회 출전을 포기할까 진지하게 고려했다.”


고민 끝에 류 학우는 아픈 몸을 이끌고 1) 월드컵 대회로 향했다. 당장 메달 가능성은 크지 않더라도 5월 진천에서 치러질 남자 기계체조 도쿄올림픽대표 최종선발전과 우즈벡에서 열릴 아시아선수권대회를 통해서도 출전권을 따낼 수 있으니 경기 감각을 최대한 유지할 심산이었다.
1) 총 네 차례 대회를 진행, 가장 성적이 좋은 3개 대회 점수를 합산해 최종 순위를 결정한다. 상위 2명까지 올림픽 출전권 획득이 가능하다.


막상 경기장에 들어서자 류 학우는 훨훨 날았다. 2월 펼쳐진 이집트 카이로 1차 대회와 독일 코트부스 2차 대회에서 각각 1위와 3위를 수성했고, 3월 치러진 아제르바이잔 바쿠 3차 대회에서는 5위를 기록했다. 4차 대회는 아직 열리지 않았지만, 앞선 3개 대회 합산 결과만으로도 류 학우는 이미 최소 2위를 확보한 상황이다.


“얼떨떨했다. ‘다시 살아나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크게 받았다. 그간 열심히 했으니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도전하라는 의미에서 하늘이 내려준 기적 같다.”

 

나가자 파리로 올리자 태극기
류 학우의 시선은 이제 파리로 향한다. 그는 파리올림픽을 통해 한국체대 개교 이래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를 두 번 밟은 재학생’이 될 예정이다. 그의 첫 올림픽이었던 2021년 도쿄대회는 코로나19로 인해 개최가 한 해 연기됐었다. 이후 3년 만인 올해 파리대회가 다시 돌아옴으로써 그는 대학 생활의 시작과 끝을 모두 올림픽으로 장식하게 됐다.


한국 체조 사상 첫 ‘마루운동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도 도전한다. 지금까지 한국 체조는 단 한 번도 마루운동 종목에서 올림픽 메달을 따내지 못했다. 선수풀이 대부분 도마 종목에만 치중돼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번 파리대회에서만큼은 마루운동 종목의 강세가 기대된다. 100년 만에 나타난 천재, 류 학우가 있으니 말이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돌이켜보면 참으로 치열한 삶이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절대 체조는 안 하고 싶다. 모든 걸 쏟아부었다고 자신할 수 있다. 이제 파리올림픽이 곧이다. 우리 대학에서 재학생 신분으로 올림픽에 두 번 나가는 건 내가 처음이라고 들었는데, 한국 체조 사상 첫 마루운동 종목 금메달까지 목에 걸고 ‘최초의 사나이’가 돼 돌아오겠다.”

 

[한국체육대학보=송현일 편집장, 박소영 부편집장, 박정윤 부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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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체육대학보(https://news.kn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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